리뷰 | 연극 엠 카지노

▲극 후반부, 등장인물들이 함께 걸어 나와 〈우리가 될 수 있을까〉를 부른다. (사진 제공: 국립정동극장 ⓒDK PRODUCTION)
▲극 후반부, 등장인물들이 함께 걸어 나와 〈우리가 될 수 있을까〉를 부른다. (사진 제공: 국립정동극장 ⓒDK PRODUCTION)

 

지난달 21일, 기자는 연극 〈DRAGx남장신사(드랙바이남장신사)〉의 첫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국립정동극장 세실을 찾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수어 통역과 한글 자막이 제공됐으며, 이외에도 안내 보행이나 공연 정보를 설명해 주는 위스퍼링 등 여러 배리어프리 지원이 제공됐다. 2021년에 초연된 엠 카지노가 새롭게 돌아와 오는 9일까지 상연될 예정이다.

 

가로지르는 모든 엠 카지노에게

엠 카지노는 총 네 개의 장으로, 1장부터 4장까지의 제목은 각각 ‘명우형’, ‘부치들’, ‘색자’, ‘나비와 봉레오’다. 각 장은 인물들의 드랙 쇼로 마무리된다. 제목부터 드랙 공연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드랙 쇼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장마다 각 인물의 서사를 촘촘하게 쌓아 나간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해당 인물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은 이들이 소수자라는 점이다. 특히 여성과 퀴어가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퍼포먼스가 극의 중심에 놓인다.

작중에서 엠 카지노를 묘사하는 표현은 ‘젠더교란극’이다. 드랙은 종종 여자가 남장을 하고, 남자가 여장을 함으로써 성별 이분법을 고착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부딪히고는 한다. 엠 카지노는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기보다 드랙과 유사한 질문을 마주하는 ‘부치’를 드랙 쇼라는 형식과 병치시킨다. 2장 ‘부치들’에서는 “부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배우들이 “레즈비언 커플 가운데 남성적 행동을 취하는…남성적 복장을 하거나 대상과의 관계에서 우세한 위치…”라며 사전에 등재된 정의를 읊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 정의만으로는 부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남성성은 남성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 남성성과 여성성은 아예 사라져야만 하는 기표인가. 드랙과 마찬가지로 이 극의 부치도 이성을 모방하는 것 아니냐는 고질적인 질문에 부딪혀 고뇌하는 존재들이다.

극에서는 결국 부치를 ‘가로지르는 엠 카지노’로 정의한다. 이는 다소 투박한 정의일지언정, 이분법적으로 정의된 젠더를 가로지르는 부치를 표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부치는 사람들 앞에 수저를 놓아주거나 물을 따라 주고, 근육을 뽐내며,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등 이성애자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역할을 수행한다. 부치는 여성성은 여성에게, 남성성은 남성에게 귀속된다는 편견을 뒤집는다. 그렇지만 남성과의 차이가 있다면, 엠 카지노은 자신의 행위가 연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엠 카지노은 여러 젠더 규범 사이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고뇌한다. 이분화된 성별 개념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부치는 드랙 쇼라는 공연의 형식과 공명한다. 엠 카지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젠더 규범에 따른 연기를 하고 있으며, 드랙은 일상에서의 연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연기를 수행해 무엇이 진짜 나다운 것인지 고민하게 해 주는 장치다. 4장에서 나비가 마치 진짜 ‘나비’가 된 것처럼 황금빛 망토를 펼치며 드랙 쇼를 펼치는 장면에서는 보는 누구나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다.

 

퀴어가 살아온 삶이 곧 퀴어의 역사다

엠 카지노는 퀴어 문화의 역사를 몸소 경험한 이들의 기록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이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은 대부분 중장년의 성소수자다. 1996년부터 레즈비언 바를 운영한 명우형부터 1세대 트랜스젠더 색자, 성소수자 부모 모임 활동가 나비까지,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직접 풀어내는 형식으로 극을 진행한다. 이 극에서는 인터뷰와 기록을 무대화하는 ‘버베이텀(verbatim)’ 방식을 차용해 주인공들의 내레이션을 극 사이사이에 삽입했다. 명우형이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지게 된 기억을 인터뷰어에게 고백하듯이 말하는 내레이션이 송출될 때, 어머니가 꾼 태몽을 회고하는 색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리고 나비가 소방관이 되기까지 들었던 잔인한 말들을 재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관객은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한 명의 증인으로서 그곳에 존재하게 된다. 관객 강유진 씨(26)는 “매체에서 퀴어를 ‘흥미로운 소재’ 정도로 다루는 경우가 많아 흔한 퀴어 소재 연극 중 하나가 아닐까 경계했는데, 경험을 자전적으로 풀어 가는 극이어서 감동받았다”라고 말했다.

주인공들이 솔직한 목소리로 풀어 나가는 이야기는 다른 세대에게도 큰 여운을 남긴다. 관객 윤백일 씨(55)는 “공연 내내 옆자리에서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어린 여성을 잊을 수가 없다”라고 고백했다. ‘부치들’ 장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나 나비의 자식인 봉레오가 중장년 배우들과 맞추는 호흡은 퀴어 문화의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비춰 볼 수 있게 해 준다. 관객 권유미 씨(25)는 “젠더 규범에 대한 도전이 세대를 넘나들어 계속된다는 점을 간접 체험할 수 있어 재밌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1세대 퀴어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데는, 엠 카지노의 이야기가 단지 한 사람의 인생사에 그치지 않고 퀴어 문화가 거쳐 온 역사 그 자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사를 녹여 낸 연극을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함으로써 엠 카지노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색자는 트랜스젠더 클럽이 매주 경찰의 단속을 받던 시절, 그리고 그곳에서 풍기문란죄로 유치장으로 잡혀가던 시절을 살아온 1세대 트랜스젠더다. 그는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공연을 올리다가 동료들과 닭장차(경찰버스)에 태워져 유치장으로 가던 길에 경찰이 그들을 차에 방치해 정신을 잃을 뻔했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공권력에 의한 폭력에 노출됐던 그가 이 이야기를 국립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게 되기까지 퀴어들이 겪어 온 숱한 세월이 있기에, 국립정동극장이라는 공간은 더욱 큰 의미가 있다. 권유미 씨는 “드랙 쇼는 퀴어 커뮤니티나 클럽 같은 폐쇄적인 공간에서만 이뤄진다고 생각했기에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국립 극장에서 이런 공연을 올렸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로웠다”라고 전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한다

그러나 소수자로 사는 삶의 애환이 엠 카지노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니다.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를 설립한 명우형이나 배우로 활동하는 색자,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에 출연한 나비와 봉레오는 미디어에 자주 노출된 유명 인사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를 담담한 톤으로 전한다. 익숙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이들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음으로써 이들의 서사에는 새로운 색이 덧입혀진다. 이들은 그 세월을 살아 냈으며, 이제 후배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당하게 살라고 조언할 수 있게 됐다. 닭장차에서 동료들에게 “우리가 지금 정신 잃으면 안 돼!”라고 외쳤던 색자는 관객들에게 말한다. “우리 같은 제3의 성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거야.”

엠 카지노이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해 택한 방식이 바로 농담과 해학이다. 봉레오는 자신의 어머니인 나비에게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이해받기까지의 긴 과정을 “사실 나비 님은 제가 키웠습니다”라는 말로 요약하며 웃음으로 승화한다. 또 부치들이 “부치 여자요, 남자요?”라고 자조적인 질문을 하는 2장에서는 관객의 폭소가 이어졌다. 이처럼 당사자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을, 당사자에게 마이크를 쥐어 줌으로써 극은 생생하게 재현한다. 극을 관통하는 코미디 요소는 소수자라는 이유로 겪는 어려움을 웃고 떨쳐 버리는 일종의 꿋꿋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엠 카지노에 등장하는 퀴어들이 웃으며 힘들었던 시간을 떨쳐 내고, 나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도 선배 퀴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와 비슷한 길을 먼저 걸은 이들에게 빚지고 살아간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별 이분법의 잣대에 나를 끼워맞출 수 없을 때도, 내 행동이 잘못됐다며 모두에게 손가락질받을 때도, 가족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정상 사회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말해줄 용기 있는 이들이 나보다 앞서간 길 위에서 뒤돌아 손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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