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중반, 마켓컬리를 시작으로 주요 유통 회사들이 전날 밤 주문한 제품을 다음 날 이른 새벽까지 배송해 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며 새벽배송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택배기사들이 특히 심야시간 배송 중 과로로 숨지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해 이들의 노동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은 ‘심야시간대(자정~오전 5시) 배송 제한’을 제안하며 새벽배송 금지가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새벽배송 서비스가 도입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는 빠른 속도로 일상화돼 소비자는 물
『지니 카지노v』은 한국의 전통예술에 관해 이지영 교수(국악과)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 교수는 문정 이말량(1908~2001) 선생의 제자다. 이말량 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전통 가무악 분야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여럿 남겼다. 무형문화유산, 국악 등 전통예술은 입에서 입으로,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전해지는 전수 과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심 부족이나 보존 노력 부재로 인해 한국의 전통이 점점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이 교수는 우리 음악을 지키고자 분투한 선조들과 그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후손,
교원 인력 유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상황에서, 해외와 국내 대학의 상이한 교원 처우를 직접 경험한 최재원 교수(경제학부)의 의견을 물었다.“연봉 격차가 네 배 가까이 나는 데다 풍족한 연구 환경, 거주비 지원 등 혜택까지 고려할 때 도저히 말릴 수 없었습니다.” 최근 언론 기사에 실린 대목이다. 서울대 경제학부의 석학 두 분이 동시에 홍콩과기대로 스카우트돼서 간 사건을 두고, 한 교수가 전한 자조 섞인 말이다.이 두 교수의 이탈은 필자가 소속된 경제학부에 뼈아픈 손실이다. 가장 활발히 연구를 이어가던 연구자 둘이 동시에 빠져나
‘비상계엄’은 이제 더 이상 군사정권 시절의 역사적 사건이 아닌, 우리 현실 정치의 중심에 등장한 위기 단어가 됐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 질서에 정면 도전했다. 지난 4일(금)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했지만,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도경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체제전쟁론’이라는 위험한 정치 담론이 있다고 진단한다. 체제전쟁론이란 무엇이며, 왜 지금 우리 정치에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한 것일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 부터는 가끔 학교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부모님이 계속 살고 계셨기 때문에 주말마다 아이를 잠시 맡기고 아내와 둘이 데이트를 하러 오기도 했고, 때로는 부모님,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오기도 했습니다. 올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은, 우리학교의 아름다운 자연과 자유로움이 오히려 졸업을 하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고 나니 더 잘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총장잔디 근처를 함께 걸으며, 이곳저곳 바뀐 건물들과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학생회관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진열된
'반도체 위기’,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용어다. 명실상부한 반도체 선진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중국의 빠른 기술력 추격과 미국·대만과의 격차 확대로 압박을 받고 있다. 정부는 작년부터 정책금융 공급과 반도체 펀드 투자를 본격 집행하는 등 위기 타개를 위해 노력했으나,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토) 발표한 ‘2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은 전년 대비 3% 감소하며 수출 감소세로 전환했다. 우려했던 위기가 현실화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체 산업의 위기의 이유는 무엇이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정부 그리고 우리나
오랫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부담됐던 지출이 식비였습니다. 집을 나서면 기본적으로 점심, 친구들과 약속이 있으면 저녁 식사까지 밖에서 사 먹어야 했기 때문에 예전에 가계부를 쓸 때 매월 지출 1위는 거의 식비였습니다. 특히 서울의 외식비는 기본이 만 원 이상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제게는 많은 부담이 됐습니다.이런 저에게 천원 학식은 1학년 때부터 고마운 존재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평소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고, 메뉴를 고를 때 많이 고민하며, 식비에 부담을 느끼는 제게 천원 학식은
[친구들에게]4.19. 그날은 다시 왔지만 왜 씁쓸해지지?금년이 62주년인가.벌써 그렇게 됐나.한참을 더듬어도 답이 나오지 않네.세월이 빠르긴 하네.그날은 우리 1학년 첫 수업이었지. 이만갑 교수의 사회학개론이 막 시작됐는데 창밖에서 깃발을 흔들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고함 소리가 유리창을 때렸지. 우리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고함 소리에 일순 어리둥절했지만 곧 너도나도 말없이 책가방을 챙겨 나왔지. 시국을 알기에는 어렸지만 이심전심이었어. 교수님도 상기된 표정으로 그냥 바라보기만 했지.동숭동 캠퍼스가 온통 긴장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서울대 학우들의 눈과 귀가 돼 주는 『지니 카지노v』의 70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7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지니 카지노v』의 줄기를 이어 나가는 데 헌신해 온 모든 분께 이 자리를 빌려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런 귀한 자리에 대학 언론인의 일원으로 제가 축사를 쓸 수 있게 돼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지니 카지노v』은 그동안 학내외를 걸쳐 다채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은 물론, 학내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참여해 다양한 이슈에 관해 토론하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나아가 학교 안팎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균형 있게 짚는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서울대가 존재하는 한 『지니 카지노v』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다. 만약 상아탑이 흔들리면 대학 언론도 흔들린다. 대학언론이 복멸하면 대학도 괴멸한다. 그러므로 대학과 대학 언론은 운명공동체다. 서로의 안위를 보살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70년의 세월 동안 『지니 카지노v』이 대학의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한 역사는 경외롭다. 온갖 풍파에도 제 역할을 다하며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지니 카지노v』 발행 70주년은 경사롭지만, 한편으론 작금의 대학 언론 생태계를 떠올리면 씁쓸하기만 하다. 일각에서는 위기 단계를
『지니 카지노v』의 학생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6월초부터였다. 각 단과대별로 한 명씩(당시 문리대와 사대는 남녀 각 1명) 소정의 시험을 거쳐서 선발된 학생기자는 총 14명이었고 초대 학생 편집장은 반영환(사대) 선배였다. 월요일에 한 번씩 8면을 발행하던 『지니 카지노v』이 1962년부터는 목요일에 4면을 발행하는 주 2회 12면 체제로 되면서 편집국은 항상 분망하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취재와 기사작성 그리고 편집과 조판까지 전임기자 두분을 모시고 매주 12면을 제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수강과 학점 취득보다는 『대학
안녕하십니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종민입니다.먼저 『지니 카지노v』 창간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지니 카지노v』은 1952년 창간 이래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학내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물론 사회적 문제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며 발언을 이어 나갔습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 한 『지니 카지노v』은 갖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부당한 권력과 사회 부조리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것에 대한 찬사를 보냅니다.계속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
서울대 학보사 『지니 카지노v』의 창간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령 2000호를 기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년에는 창간 70주년이라는 경사를 맞았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무겁고 엄중한 마음으로 정론직필에 주야골몰한 『지니 카지노v』 구성원들에게 심심한 박수를 보냅니다.3년 전부터 시작된 신종 감염병의 대유행은 대학언론에도 큰 고민을 안겼습니다. 북적이던 캠퍼스는 급격하게 활기를 잃었고, 이로 인해 『지니 카지노v』 역시 적잖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낯선 캠퍼스에 적응하고, 이내 새로운 의제들을 찾아나서야 했기에 적
먼저 『지니 카지노v』 2000호 출간을 축하한다. 좋은 일도 있었고 궂은 일도 있었을 것이다. ‘논어’ 식으로 하자. 없어서는 안 될 의미 있는 일을 2000번 해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내가 주간을 맡은 때는 좋은 때가 아니었다. 신문사 자체가 지금처럼 충분한 공간을 가지지 못하고 그렇지 않아도 비좁다는 도서관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지금처럼 신문사에서 조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촌 로터리에 있는 인쇄소에서 다른 대학 기자들과 차례를 다퉈가며, 때로는 자정을 넘기며, 조판을 했다.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지금은 학생 기자
67년이라는 긴 시간, 서울대학교를 기록한 『지니 카지노v』의 2000호를 축하합니다. 2000호 발행을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간 얼마나 많은 『지니 카지노v』 기자들이 『지니 카지노v』을 위해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 어림해 봅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나 신문은 ‘팀플레이’입니다. 일선을 뛰는 취재기자, 기사를 검토하는 부장기자, 모든 일을 총괄하는 편집국장, 어느 한 명만 빠져도 좋은 기사, 좋은 신문은 없습니다. 2000호까지 좋은 ‘팀플레이’를 이어 온 『지니 카지노v』 기자단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화했
서울대학교 『지니 카지노v』 지령 2000호 출간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서울대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성의 자리에 초대해 줘서 감사드립니다. 서울대와 『지니 카지노v』이 불확실성이 가득한 장래에 밝은 빛을 비춰주기를 기원합니다.서울대가 동숭동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을 관악산 기슭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출발하는 관악캠퍼스 준공식을 거행했던 것이 벌써 50년이 다 돼가는 1971년이었습니다. 당시 학생대표였던 국어국문학과 64학번 정희성 시인의 축시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명시였습니다. “그 누가
지난 봄에 최은영 작가의 「몫」을 읽고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던 기억이 있다. 소설이 그려내는 학보사 경험에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공간의 답답함이나 그 안에서 느낀 사명감에 가까운 책임감이 한꺼번에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보사는 글은 잘 쓴다는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처음으로 깨뜨린 공간이면서, 「몫」의 해진이 그러했듯 그래도 글을 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 공간이었다. 한편, 희영이 말하는 편집부의 기만을 나 또한 별다른 성찰 없이 반복했다는 반성도 했다. 나 역시도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 『지니 카지노v』이 나
2004년 11월 15일 저를 포함한 학생 기자들은 제호와 광고, 기고문을 삭제하고 학생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와 칼럼만으로 무제호 『지니 카지노v』을 발행했습니다. 동창회보의 기사형 광고를 『지니 카지노v』의 광고란에 게재하라는 주간의 지시에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고 비용을 지불한다는 이유로 신문 지면에 타 언론의 기사 게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학생 기자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주간은 인쇄 중단을 지시했고, 학생 기자들은 모아 왔던 기금으로 무제호 『지니 카지노v』을 발행했습니다.파장은 컸습니다. 학내외 많은 구성원들이 관심을 가졌고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이뤄낸 경제 성장과 민주화는 많은 젊은이의 헌신과 희생으로 이뤄졌다. 현대 역사의 증인인 이들 젊은이의 열정과 실존적 고뇌가 상아탑에서 자유롭게 표출된 곳이 바로 우리 『지니 카지노v』이다. 『지니 카지노v』은 우리나라 대학의 신문을 대표하는 정론지며, 최고의 권위를 이어 왔다. 또한 『지니 카지노v』은 한국 문단의 상징인 대학문학상 시상 60회를 이어오면서 문학계에 새바람을 몰고 온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지니 카지노v』 20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대학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고등 지적 체
『지니 카지노v』 최근치를 받아 보니 ‘총학생회 20년사: 공약으로 다시 보기’라는 기획이 있었다. 20년사라…. 그런데 기점이 2000년도 선거다. “아, 여기서 나는 ‘역사 이전’의 세대네?” 싶었는데, 그 뒤에 이 글의 청탁을 받게 됐다. 요즘 말로 “라떼는 말이야(Latte is horse: 나 때는 말이야)”를 피하기 어렵겠다. 나는 신입생이던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지니 카지노v』 기자를 했고, 대학은 2001년 말에야 떠났다. 가방끈보다 훨씬 긴 대학 시절을 두고 누가 물어보면 “제3세계 대학에 들어가 제1세계 대학을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