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거리 극장>을 좋아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본 글은 <삼거리 극장>을 능동적이고 불손한 퀴어 영화로서 좋아해 보려는 시도다.”
우수작의 결론 부분에서 발췌한 대목인데, 소박한 톤으로 적혀 있지만, ‘좋은 비평’의 본질 세 가지를 정확히 포착해버린 문장이다. 첫째, 비평은 당신이 “좋아하는” 그것을 계속 좋아하고 더 좋아하고 큰 소리로 좋아하는 사랑의 작업이다. 둘째, 그러기 위해선 방법이 필요한데, “여러 방법” 중에서 무엇이 대상 작품에 적절한 ‘바로 그’ 방법인지를 찾는 것은 비평 노동의 핵심이다. 셋째, 그렇게 쓰인 글은, 에세이라는 말의 본래 뜻 그대로, 하나의 “시도”다. 완결된 진리를 공표하는 게 아니라 정신의 움직임을, 사유의 퍼포먼스를, 그게 그 순간의 최선이기 때문에 미완성인 채로 감행하는 글이다.
이 세 조건에 비춰 보면 이 글의 장단점이 드러난다. ‘삼거리 극장’처럼 버려져 있던 어느 영화를 좋아하기로 한 이 선택이 반갑고,
‘퀴어링의 전략’이 해당 영화를 빛나게 만드는 방법임을 증명한 것도 짜릿하다. 그러나 원전보단 2차 문헌에서 재인용한 대목이 많다는 것은 ‘방법’의 층위에서 아쉽고(‘재생산적 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리 에델만(Lee Edelman)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등), 교과서적인 구성을 취해 작품의 내용 요소들을 퀴어 비평 개념으로 1차 번안하는 정도에서 그친 점은 ‘시도’의 측면에서 아쉽다. 극중 삼거리 극장이 ‘옳은 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아가야만 나온다고 했던가. 수상자의 행보가 그랬으면 좋겠다.
신형철 교수(영어영문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