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 카지노생 시절 학보사 기자로 일하던 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선고가 있었다. 학보사의 정기자가 되고 맨 처음으로 쓴 기사가 국립외교원에서 진행된 박근혜 정권의 외교 정책을 돌아보는 세미나에 관한 기사였는데, ‘박근혜 정부 3년, 체크포인트에서 외교를 되짚다’라는 제목은 미처 임기를 채우지 못한 정권의 탓으로 일종의 오류로 남았다. 당시 기자들과 함께 탄핵 선고를 지켜본 기억이 새록새록 나고, 학보사를 무사히 마친 이듬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계획했었다는 꽤 구체적인 증거들이 밝혀지는 것을 지켜보며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일이 있을 뻔했구나’ 가벼이 생각하고 지나간 기억도 난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지나 박사과정을 수료할 즈음 다시 지니 카지노v사의 일원이 됐다. 2024년 12월 2일 자로 『지니 카지노v』 2106호가 발행됐는데, 간사 직책으로 처음으로 보낸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종간호였다. 1면에 윤석열의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서울대 교수진의 시국 선언문이 발표된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고, 대학만평으로도 여러 대학에서 잇따라 시국 선언문이 발표되고 있음을 다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늦은 밤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의해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 이게 진짜로 일어난 일이 맞는지를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23시를 기점으로 계엄사령부 포고령이 발표됐고, 그때부터는 계엄 해제 소식을 듣기 전까지 꽤 실질적인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대학 언론에 소속돼 있다는 사정으로 인해서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겠다는 대목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두어 차례 사용된 ‘처단’이라는 말이 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12·3 비상계엄의 선포 이유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계엄 선포 직후 공개된 계엄사령부 포고령에는 △일체의 정치 활동 금지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 금지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파업, 태업, 집회 금지 등 항목이 포함됐다. 계엄령의 선포 취지는 “유신 체제는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입니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포고령의 1~4번 항목도 사실상 과거 계엄령 선포 사례의 포고령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가 어떤 상상력을 기반으로 벌어진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
한편, 3일 밤에 벌어진 사태가 4일 새벽에 종료됐고, 이후 계엄령 선포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경고성’이었다는 식의 궤변이 덧붙은 탓인지 종종 해당 사건 자체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발견하고는 한다. 거대 야당의 횡포가 극심했으니 이를 알려야만 했고, 실제로 피해를 본 사람이 없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냐는 식의 논리다. 관련해서는 계엄사 포고령의 5번 항목을 문제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사례의 복사 붙여넣기에 가까운 다른 대목들은 경고성이라며 포장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전공의를 비롯해 파업 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해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에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라는 내용을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을 문제 삼아 일으킨 계엄임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정권의 입장에서 철저한 이익 집단으로 비췄을 의료인들이 북한 공산 세력과 실질적인 연관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정치적 폭압이 여전히 작동할 수 있으리라는 무리한 상상력이 2017년을 지나, 2024년에 또다시 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은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고, 나는 항상 옳고 정의로우며 반대편은 무조건 악하고 그릇됐다는 식의 매우 단순화된 이분법적 구도에서 비롯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문재인 정권 시기를 거치며 거대 양당 체제가 굳어진 이후, 이 편 가르기의 정치학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 비루한 상상력이 손 쓸 수 없이 커지는 가운데, 상대편을 직접 처단하고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결심에까지 이른 것이리라. 그렇다면 12월 3일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비상계엄의 명목이 된 공산 세력 척결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라는 수사는 반중 정서와의 결탁으로 오히려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마수를 뻗고 있는 낡은 정치적 상상력 아래에 놓여 있는 한, 어쩌면 우리는 작년 겨울과 엇비슷한 일을 재차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들을 되돌아볼 때다. 반복되는 역사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도록. 가난한 상상력에 잡아먹혀 또 다른 비극을 묵인하게 되지 않도록.
이경인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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