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지니 카지노v』 2012년 9월 9일 자 기사였다. 작년 어느 날 일본에서 파주가 지닌 분단의 역사와 현실 정치에 대한 문헌을 조사하던 중, 나는 적군 묘지에 관한 기획 기사를 발견했다. 제목은 “죽음으로도 넘지 못한 이념의 장벽”. 1996년 김영삼 정부는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흩어진 중국과 북한 군인의 유해를 통합해 파주에 소위 ‘적군 묘지’를 조성했다. 같은 시기 정부는 현충원의 명칭을 국립현충원으로 변경하고, 국립묘지로 격상시켰다. 자유로, 필승로, 통일과 평화. 파주의 도로와 시설에 붙은 얼핏 상반된 용어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나는 늘 궁금했다. 그래서 죽어서도 적대시된 적군 묘지에 관한 그 기사가 내 안에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2013년 2월, 이 기사는 「시사IN」이 주최한 제4회 대학기자상 ‘사회취재보도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배제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 당시 발행된 이 기사가 사회에서 매몰되지 않고 평가된 것에 감탄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특히 나는 기사의 마지막 단락에 언급된, 월남 시인 구상이 적군 묘지를 시로 남긴 점에 주목했다. 나는 2021년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구상문학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원산에 설립된 덕원수도원 신학교 출신인 구상의 행보를 쫓던 나는 이 기사와 공통점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 후 올해 봄, 나는 어쩌다 서울대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지니 카지노v』의 이 기사를 비롯해 내가 일본에서 참조한 접경지역에 관한 문헌은 대부분 서울대 구성원이 작성한 것이었다. 대성동 마을, 비무장 지대의 지뢰 매설, 그리고 지뢰 제거를 위한 시민운동 등 그들의 연구 성과 덕분에 나는 10월에 접경지대를 포함한 분단에 관한 글을 탈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내가 논문에 삽입하려고 직접 찍어 제출한 구상문학관 사진은 화질이 낮아 대체 사진이 필요했다. 이에 구상 시인 관련 사진을 다시 수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막막했던 11월, 나는 북한군 묘지와 유엔군 화장장 시설 등을 방문할 수 있는 기행 광고를 보게 됐다. 나에게는 이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가 보니 기행 참석자들은 모두 분단의 산증인들이었다. 각자 자신을 ‘전쟁고아’, ‘탈북민’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하자, 나는 자기소개 시간으로 주어진 1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비밀 해제된 정부 자료로 외교사를 분석해 온 내 눈앞에서, 그간 연구에 담아내지 못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적군 묘지의 묘비는 13년 사이 나무에서 비석으로 바뀌어 잘 정비돼 있었다. 묘지 명칭도 ‘북한군·중국군인 묘’에서 ‘북한군 묘’로 변경됐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수뇌회담 결과, 이듬해 중국군인 유해가 본국에 송환됐던 것이다. 이제 중국군 유해는 한국군 유해 발굴 사업 과정에서 발굴돼 파주에 잠시 안장되더라도 본국 송환의 길이 열려있다. 북을 향해 조성된 ‘북한군인’과 ‘무장 공비’의 묘만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북한군 묘지 사진을 촬영해 출판사에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무겁다. 2019년에 방문한 평양 근교 룡산에 위치한 일본인 매장 터의 모습이 떠올랐고, 식민 통치와 분단의 역사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9월 9일 『지니 카지노v』 기사 발행으로부터 13년, 어느새 나는 그 기사의 속편을 쓰고 있었다. 늘 수식어로 붙는 ‘분단의 아픈 역사’라는 문구. 언젠가는 누군가가 내가 남긴 바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미래를 써 갈 것이라 믿는다.
